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 (문단 편집) == 교전 초기 == [[파일:attachment/79552-050-5B7249FA.jpg]] 이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전쟁을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게 된다.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은 보통 1964년 벌어진 [[통킹만 사건]]으로 간주하지만, 그 이전에도 양측은 1960년대초부터 서로의 후방에서 게릴라 침투 공작을 벌이며 국지적인 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1964년 7월 말에는 [[라오스 왕국]]이 북베트남군에게 자신의 영토([[호치민 루트]])에서 나가라며 북베트남을 폭격했고, [[베트남 공화국군]]이 [[북베트남]] 관할하의 혼메 섬과 혼니우 섬에 상륙해서 점령해 무력 충돌은 점점 심각해졌다. [[19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본격화했다. 1964년 8월 5일 그는 북베트남 폭격을 지시했으며, 이것이 일명 '''피어스 애로우 작전'''이다. [[미합중국 해군|미 해군]] [[항공모함]]의 전폭기들이 [[베트남 해군|북베트남 해군]] [[어뢰정]] 기지와 석유저장시설에 폭격을 실시했다. 북베트남 해군의 대공포가 미국 해군 [[A-4 스카이호크]] [[공격기]] 2기를 격추했다. 폭격 실시 2일 후에 미국 의회에서 통킹만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피어스 애로우 작전에 대한 보복으로 [[11월 1일]] 베트콩이 비엔호아 [[미합중국 공군|미국 공군]] 기지를 공격하여 4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했다. [[B-57]] [[폭격기]] 등 항공기 27대가 파괴되었으며 이후 이에 대한 다소 애매한 보복전 성격인 미군의 '''배럴 롤 작전'''이 벌어진다. 목표는 라오스에 존재했던 호치민 루트 타격이었으나 표면적으로는 라오스 정부군을 돕는다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다만 직접적으로 라오스 국경을 넘어서 폭격을 하는 것은 협정에 의해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야간에 조명탄에 의존해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공격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틈타 베트콩이 미군 장교 막사를 연달아 폭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미국인 2명이 죽었다. 그러나 미군은 확전을 원하지 않았는지 이에 대한 보복전을 펼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콩은 미군에 대한 일련의 보복전을 이어나갔다. [[1965년]] 2월 7일 베트콩은 중부 고원 지대에 있는 미국 육군의 쁠래이꾸 기지를 습격해 미군 8명이 전사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미군 헬기 7대를 파괴했다. 이에 분노한 존슨은 6일 뒤 즉각 30대의 미 공군 전투기(A-1, F-100)를 동원해서 북베트남군 병영에 대한 공습을 지시했다(플레이밍 다트 작전 1). 사흘 후인 2월 10일 베트콩이 쿼논의 미군 기지를 습격해서 미군 23명이 전사했다. 미군은 다음날인 11일과 19일 보복 공습을 실시했다(플레이밍 다트 작전 2). 이어 20일 미군은 남베트남 공군과 합동으로 대규모 폭격을 실시하려 했으나 남베트남 내부의 정치적 소요로 작전이 4차례나 연기된 끝에 3월 2일에야 실시되었다. 이것이 '''[[롤링썬더 작전]]'''이다. 1965년 3월 미 대통령 린든 존슨은 다낭 공군 기지의 미군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미 해병대 2개 대대를 남베트남에 파병하고, 이어 2개 대대를 추가로 파병했다. 1965년 3월 8일 미 해병대 2개 대대가 다낭에 상륙했다. 당시 남베트남의 미군 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상당한 규모의 미군 병력이 주둔하지 않으면 '베트콩 전국 장악'이 1년 내에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국지전 수준에 머물렀고, 대규모 지상 전투 수준으로는 확전되지 않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북베트남을 위협해서 그들의 남베트남 합병 야욕을 저지해보려는 수준에 머물렀고, 전면전으로의 확전을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65년 3월 30일 사이공에서 미국 대사관 폭파 테러로 218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터져버리고 만다. '''결국 사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고 베트남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1965년 5월 초 연대 규모의 베트콩 부대가 푹룽성(省) 성도를 공격했다. 그들은 1960년대 초에 남베트남군과의 교전에서 노획한 무기들을 사용했다. 남베트남군은 적수가 되지 못했고, 베트콩 부대는 하루 사이에 도시를 점령하고 퇴각했다. 5월 말에는 베트콩 부대가 꽝응아이 근처에 있던 남베트남군 여단을 매복 공격하여 며칠 동안의 전투 끝에 남베트남군 2개 대대를 완전히 괴멸시키기도 했다. 1963년 압박 전투에서와 같이 남베트남군은 베트콩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이는 결국 미 지상군이 투입되어 베트콩을 상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11월 14~18일에는 두 번의 큰 전투가 플레이미 서쪽에 있는 남베트남의 중앙 고원인 이아드랑에서 일어났다. [[이아드랑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이아드랑 전투에 투입되었던 미군은 약 4일간의 전투에서 우수한 화력을 동원하여 북베트남군 1,700명 이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미군 또한 300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물론 이아드랑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당시 미군은 LZ Albany 지역에서 최소 155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는 패배를 겪기도 했다. 영화 위워 솔져스에서는 생략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